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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문화유산/서울경기

인천 강화 연미정 및 월곶돈대

by sajin365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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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연미정 (燕尾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수량/면적 : 1동 / 2,149㎡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자료 : 국가유산포털

안내판 
연미정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자산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연미:燕尾)와 같다고 하여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의 절경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31년 (1244)에 구재학당(九齋學堂)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공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 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20년(1744)에 중건 되었으며, 조선 고종28년(1891)에  중수한후 여러차례 보수되었다. 



월곶돈대
월곶진에 속한 원곶돈대는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북으로는 조강을 통하여 서해요 진출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서울,인천,연백 등지로 교통 할 수 있는 월곶 나루가 있던 해상로의 요충치이기도 하다. 월곶돈대는 조선숙종 5년(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동서 폭 47M,. 남북 폭38M이다. 서쪽하단부에는 원곶진의 문루인 조해루를 복원하였다 .

 


안내판 
황형택지(향토유적)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1520)의 예 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언평 시호는 장무이며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11년(1480)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혜산진 첨절제사,훈련도정,의주목사,회령부사,함경도,경상도 병마절도사을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중종 7년(1512)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곳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곳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연미정 (燕尾亭)
2024.09.15


문현준의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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